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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 톡] 아빠에게 실수로 잘못 건 전화 한 통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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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7.13 03:10

[밀레니얼 톡] 아빠에게 실수로 잘못 건 전화 한 통
큰맘 먹고 비싼 헤드폰을 샀다. 주변 소음을 반의반으로 줄여 준다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탐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소란한 도시인 서울에다 터를 잡아놓고서는 시끄러워 죽겠다며 헤드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내 모습이 삼겹살을 먹으면서 돼지 냄새 난다고 불평하는 사람처럼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달리 방도가 없었다. 효과는 과연 대단했다. 지옥으로 질주하는 급행열차를 방불케 하는 지하철 5호선의 굉음이여, 안녕. 점심시간이면 카페로 쏟아져 나와 상사를 욕하는 회사원들의 멱 따는 소리여, 안녕. 버스와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이여, 이제 모두 안녕. 돈값을 톡톡히 하는 헤드폰이 신통방통해 밤낮으로 쓰고 다녔더니만 잠시 벗어 두기만 해도 "귀 떨어졌다, 귀!" 하는 놀림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따금, 이놈의 헤드폰이 말썽을 부린다. 무르팍 어딘가를 툭 치면 반사적으로 다리가 휙 올라가듯 헤드폰 어딘가를 톡 치면 아무에게나 전화가 획 걸려버리는 식이다. 그 대상이 가까운 친구라면 다행이지만 고릿적에 헤어진 남자 친구라든지 원수지간인 옛 직장 동료라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얼마 전에도 헤드폰을 머리에 이고 길을 걷는데 귓바퀴 언저리가 가려워 벅벅 긁다가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신호가 갔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내 든 나는 화면에 떠오른 '아빠'라는 두 글자를 보고 기절초풍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제 아버지와 통화하는 게 무어 별일인가 싶겠지만, 평소 안부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나에게 무자식이 상팔자라며 죽는소리하는 아빠를 향해 무소식이 희소식인 줄만 알라며 뻗대던 내가 아닌가. 통화 종료 버튼을 거듭 눌러 댔으나 어쩐 일인지 먹통이었다.

"여보세요."

이주윤 작가
이주윤 작가
마주 오는 사람들의 왁자한 수다와 내 곁을 부르릉 스쳐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와 거리에 즐비한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득한데, 저기 저 멀리에 있는 아빠의 무뚝뚝한 음성만은 귓가에 또렷하게 와 닿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숨결 마디마디에 숨은 문장 하나하나가 들려왔다. 어디서 누구와 무얼 하고 있느냐,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느냐, 오래간만에 네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이지 기분이 좋구나. 이 모든 말을 뭉뚱그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느냐고 투박하게 묻는 아빠에게 나는 짐짓 태연하게 둘러댔다. "아니, 아빠 생일도 다가오고 하니까 집에나 한번 내려갈까 하는데 이번 주말에 다른 약속 있나 물어보려고 전화했지." 아빠는 일하느라 바쁜데 뭣 하러 오느냐 퉁을 놓았지만 나는 분명 들었다. 말끝에 묻은 희미한 웃음소리를 말이다.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후일담이다. 그날 저녁, 적막하기만 했던 두 노인의 식탁 위에 오손도손 이야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오늘 낮에 막내가 전화를 했네, 어머나 그 애가 웬일이래, 내 생일이라 전화했다는데, 세상에 기특하기도 해라 아빠 챙길 줄도 알고, 그러게나 말이야, 하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아버지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막내딸 자랑을 떠벌리고 있을 테지. 헤드폰을 꾹 눌러쓰고서 거리를 걷는 발걸음이 전에 없이 무겁다. 괜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머리를 연신 쓸어 넘겨 본다. 그러다 헤드폰 어딘가에 손이 잘못 스쳤는지 나더러 뜬금없이 '음성 명령'을 내리란다. 이런 요물 같은 헤드폰을 다 봤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시리야, 아빠한테 전화 걸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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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13, 2020 at 01:1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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