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병변 장애인 인터넷 재약정 때도
보호자 동의 요구하며 판매 거부 물의
대리점 앞 1인 시위 벌이자 규정 바꿔
광진구 주민센터선 증명서 발급 거절
인권위 “장애유형 고려 안 해” 개정 권고
관공서·업체 등 장애에 대한 무지 여전
미숙한 존재로 보는 사회인식도 한몫
“장애인 권리 제한은 보호가 아닌 편견
자기결정권을 갖게 해야 진정한 보호”

#1. “보호자 없이 왔는데… 개통해주면 안 되는 거죠?” 뇌병변장애인 A씨는 지난 6월 새 휴대전화를 사려고 서울 광진구의 한 LG유플러스 대리점을 찾았다. 그러나 A씨의 장애인 복지카드를 본 직원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뇌병변장애인은 혼자 오면 불가능하다”며 돌연 A씨의 휴대전화 구매를 거절했다. 뇌병변장애는 뇌성마비·뇌출혈·파킨슨병 등 뇌 손상으로 인한 신체기능 장애인데 보통 인지 능력은 떨어지지 않는다. A씨가 “내가 내 휴대전화를 바꾸고 싶은 건데 왜 보호자가 필요하냐”고 따졌지만 직원은 “규정상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A씨는 휴대전화를 사지 못하고 대리점을 나서야 했다.
#2. 뇌병변장애인 B씨는 지난 7월 기존에 사용하던 인터넷·TV 상품을 재약정하려고 부산 북구의 한 LG유플러스 대리점을 방문했다. 재약정 처리를 끝낸 B씨는 뒤늦게 대리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리점 직원은 “본사에서 뇌병변장애인은 보호자 대동 시에만 가입이 가능하다고 한다”며 재약정을 거절했다.
얼마 전 LG유플러스가 뇌병변 등 특정 유형 장애인에게 상품 판매 시 보호자 동의를 받도록 하는 내부 지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장애인단체들은 LG유플러스가 과도한 조치로 장애인을 무시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 만큼 장애인을 ‘미숙한 존재‘로 보는 사회적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장애인은 ‘보호자’ 데려오라는 기업
1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에 따르면 지난 6월 이후 ‘LG유플러스에서 장애인에게 상품 판매를 거부한다’는 상담이 장추련에 접수됐다. 확인 결과 LG유플러스는 6개 유형(지적·자폐성·뇌병변·뇌전증·정신·언어) 장애인이 혼자 방문했을 경우 휴대전화 개통이나 기기변경, TV·인터넷 가입을 금지한다는 지침을 세우고 6월부터 전국 대리점에 내려보낸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유형 장애인이 상품 가입을 원한다면 보호자와 동행하거나 동의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LG유플러스 측은 “일부 대리점 직원이 장애인에게 비싼 요금제를 가입시키는 등 사기 피해가 발생해 이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상품 가입을 거절당한 장애인들은 8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들은 진정서에서 “자기 선택과 결정의 권리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라며 “LG유플러스의 제한은 과도한 조치이며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장추련과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등이 같은 달 LG유플러스에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대리점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자 LG유플러스는 뒤늦게 사과하고 지침 적용 장애유형을 6개에서 3개(지적·자폐·정신장애)로 줄였다. 하지만 장애인단체들은 이런 규정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인지 능력 얘기가 나오자 적용 장애를 축소한 건데 그렇다면 ‘인지에 어려움이 있으면 권리를 침해받아도 되냐’는 문제가 남는다“며 “LG유플러스와 조만간 면담을 진행하고 지침을 점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사무국장은 “다른 통신사(SKT와 KT)에서는 LG유플러스 같은 장애인 차별 가이드라인이 명시적으로 없다”며 LG유플러스의 문제는 책임을 장애인에게 돌리는 듯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LG유플러스는 장애인 피해를 막기 위해 규정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피해자 권리를 제한하는 형태로 대안을 만들고 책임을 전가해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며 “사기는 판매자 윤리교육과 가해자 엄중 처벌 등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장애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만든 규정이었는데 의도와 달리 차별이라는 지적이 제기돼 개선안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인감증명서 발급도, 운동도 ‘혼자는 안 돼’… 장애인 존중 필요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사례는 끊이지 않고 있다. 뇌병변장애인 C씨는 2019년 서울 광진구의 한 주민센터에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으려다 거부당했다.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는 C씨는 말을 하거나 글씨를 쓸 순 없지만, 인지 능력은 떨어지지 않아 문자를 음성으로 바꿔주는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소통한다. 하지만 당시 주민센터 직원은 “말이나 글로 신청 사유를 설명해야 한다”며 증명서 발부를 거절했다. C씨는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고, 인권위는 “장애유형·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인감 증명 발급을 거부하지 않도록 사무편람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이밖에 뇌병변 장애인이 서울 강서구의 한 주민센터 헬스장을 찾았다가 “보호자 없이 운동하는 것은 안 된다”며 거절당한 사례가 알려지면서 주민센터가 사과를 한 적도 있다. 10여년 전 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된 D(42)씨는 “다친 후 나를 대하는 시선 때문에 힘들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은 혼자 아무것도 못 한다고 보는 이가 많다”며 “작은 물건을 살 때도 ‘보호자는 없냐’고 하기도 한다.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송아영 가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장애인을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이라며 “편견이 작동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어 “장애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보호가 아니다“며 “장애인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보호”라고 말했다.
◆“장애 특성에 맞는 정보 제공이 우선”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이 정보를 습득하고 소통하는 데 쉽도록 돕는 작업을 하는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 백정연(사진) 대표는 1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보다 이들에게 맞는 ‘정보’를 먼저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비장애인의 관점으로 정보를 만들거나 제공해 왔다고 지적하면서다.

백 대표는 발달장애인들의 자기결정권을 높이려면 쉬운 정보·문서로 번역되는 ‘이지 리드(Easy Read)’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백 대표가 과거 15년간 사회복지사로 현장에서 일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점이기도 하다. 백 대표는 “기업이나 공공 기관에서 제공하는 자료가 발달장애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여 있지 않았다”며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통해 글을 보고, 청각장애인들이 수어로 소통하는 것처럼 발달장애인 특징에 맞는 정보 소통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소소한 소통 측은 지난해 6월 ‘장애인을 위한 코로나19 안내서’를 발간했다. 안내서는 비말이나 사회적거리두기 등 코로나19 관련 의학용어나 방역지침을 일러스트 이미지로 쉽게 설명한다. 또 기존 자료와 달리 쉬운 어휘, 간단한 문법을 사용한 짧은 문장으로 발달장애인들이 스스로 자료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끔 정보를 제공한다. 백 대표는 “발달장애인은 요즘 가장 중요한 코로나19 관련 정보를 접할 때도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며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감염병에 대한 정보를 익히고 예방수칙을 지킬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백 대표는 소소한 소통에서 만든 콘텐츠가 발달장애인들의 실제 삶을 변화시켰을 때가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 회사가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근로계약서’를 만들었는데 한 발달장애인분이 그 계약서를 보고 취업을 했다고 연락이 왔다”며 “그동안 쓴 근로계약서와 달리 ‘회사랑 무슨 약속을 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해줘서 뿌듯했다”고 말했다.
백 대표는 더 많은 곳에서 장애인의 특성에 맞는 정보들이 의무적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대표는 “장애인들의 알 권리가 신장돼야 이들이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체성을 띠게 된다”며 “그런 세심한 배려가 현장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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